언제나 사각거리는 만년필 선에 기대어 조용히 힐링을 찾던 드로잉 시간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힐링은커녕, 영혼까지 탈탈 털린 복잡하고도 치열했던 작업기를 들고 왔습니다. 늘 건물이 있는 풍경이나 정물만 그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겁도 없이 ‘인물화’에 처음으로 도전해 보았거든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인물화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요.
✒️ 연필과 펜을 수백 번 넘게 움직여야 하는 정교함의 세계 처음 그려보는 사람의 얼굴은 그동안 그렸던 그 어떤 풍경보다 까다롭고 예민했습니다.
0.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눈, 코, 입: 건물은 선이 살짝 삐뚤어져도 “어반스케치의 멋”이라며 넘어갈 수 있었는데, 사람의 얼굴은 눈동자의 위치, 콧날의 각도, 입술의 두께가 단 0.1mm만 어긋나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더군요. 만년필 촉을 쥔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수백 번의 붓질과 완급 조절: 형태를 잡기 위한 연필선부터 그 위에 명암을 얹어가는 과정까지, 펜과 연필을 정말 수백 번 이상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습니다. 턱선과 목덜미 아래에 들어가는 맑은 해칭선(Hatching) 하나를 그을 때도 인상의 입체감이 죽지 않도록 숨을 참아가며 선을 쌓았습니다.
찰나의 시선을 포착하는 일: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듯한 맑은 눈망울과 가볍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가닥들을 표현할 때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습니다. 다 그리고 나니 온몸이 뻐근하고 진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 드로잉을 마치며 (feat. 당분간 인물화는 폐업합니다) 종이 위에 완성된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뿌듯함보다는 “와, 진짜 하얗게 불태웠다”라는 탄식이 먼저 나옵니다. 드로잉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시작한 취미인데, 이번만큼은 고도의 정신 수양을 한 기분이에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신 그리고 싶지 않다!”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역시 저에게는 고즈넉한 풍경이나 담백한 정물이 체질에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스케치북 한 페이지를 넘기며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디뎌보았다는 것에 애써 위안을 삼아봅니다. 당분간은 만년필 촉을 쉬게 해 주거나, 아주 단순하고 편안한 풍경으로 돌아가 흐트러진 멘탈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이웃 여러분, 제 처절한(?) 첫 인물화 도전기 어떠셨나요? 당분간 인물화는 다시 볼 일 없을 테니(웃음), 이번 포스팅만큼은 마음껏 구경하시고 격려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넋이 나간 채로 인사 올립니다. 총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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